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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 50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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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이름이 여러 가지이던데요. 무엇이 있죠?

잘 알려진 다산茶山 이외에, 여유당與猶堂, 열수洌水, 사암俟菴 등이 있다. ‘철마산초鐵馬山樵’라는 호도 있다. ‘철마산의 나무꾼’이라는 뜻이다. 철마산은 고향집 근처 산이다.

‘다산’이란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후반 10년 동안 기거했던 곳은 주위에 차가 많이 자라고 있어 ‘다산茶山’이라고 불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기에 후학들이 그를 ‘다산’이라 불렀다.

‘여유당’이란 호는 무슨 뜻인가요?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지은 당호堂號이다. 노자의 글 “여혜, 겨울 시내를 건너듯, 유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與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鄰)”이란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용기만 있지 지모가 없으며, 선善만 좋아했지 가릴 줄 몰라서 그만둘 일도 그만주지 못하는 것이 정약용 자신의 약점이라고 반성했다. 그래서 겨울 시내를 건너지 않듯 부득이한 것이 아니면 그만두고, 부득이한 경우라도 두려움이 있으면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약藥이라는 것이다.

‘열수’라는 호는 무슨 뜻인가요?

정약용은 고증을 통해 문헌에 나오는 ‘열수洌水’라는 것이 한강을 가리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한강변에 사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열수라는 호를 사용했다.

‘사암’이란 호는 무슨 뜻인가요?

정약용은 회갑 때 지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사俟’는 ‘기다린다’는 의미다. 「중용中庸」 29장에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는 구절이 있다. 학문적 자부심일 수도 있고, 훗날 자신의 뜻을 공감해 주길 기다리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두 가지 의미 다일 수도 있다.

정약용이 어디서 태어났나요?

정약용은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기도 남양주시南陽州市 조안면鳥安面 능내리陵內里 마재마을이다.

정약용이 언제 태어났나요?

1762년(임오년)이었다. 그 해는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임을 당하는 참극(‘임오화변’)이 벌어진 해였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압해押海 정씨丁氏 정재원丁載遠(1730~1792)이다. 정약용의 집안은 8대에 연이어 홍문관弘文館 관리를 역임했다. 홍문관은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리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정약용 집안을 ‘8대 옥당 집안’이라 불렀는데, 명예로운 칭호였다. 한동안 벼슬이 끊겼지만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누구인가요?

해남海南 윤씨尹氏(1728~1770)이다. 이름은 ‘윤소온尹小溫’으로 알려져 있다. 윤선도尹善道의 6세손이며,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윤두서는 호가 공재恭齋이며,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이자 실학적 경향을 보인 학자였다.

정약용의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정약현丁若鉉은 이복형제로 의령 남씨 소생이다. 그의 첫 부인은 ‘이벽李蘗’의 누이였는데, 이벽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의 딸은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했다. 둘째형 정약전丁若銓과 셋째형 정약종丁若鍾 정약용과 같이 해남 윤씨 소생이다. 정약종은 신유년(1801년)에 순교했다. 누이는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했는데,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서모庶母 김씨 소생으로 정약횡丁若鐄과 두 여동생이 있었다.

정약용이 언제 누구와 결혼했나요?

15세에 한 살 위인 풍산 홍씨洪氏와 결혼했다. 그의 이름은 ‘홍혜완洪惠婉’으로 알려져 있다. 홍씨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한 홍화보洪和輔의 딸이었는데, 남인계의 집안이었다. 유배로 헤어진 기간도 있었지만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60년을 함께 살았다.

정약용의 자식은 몇 형제였나요?

6남 3녀를 낳았는데, 4남 2녀를 잃었다. 요절한 원인은 대부분 천연두 때문이었다. 정약용이 「마과회통」을 지은 간절한 이유가 있었다. 성장한 2남은 학연과 학유이다. 딸은 강진으로 시집갔다.

정약용은 성장기에 공부를 누구에게 배웠나요?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세에 아버지에게서 경서經書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이익李瀷의 종손인 이가환李家煥 등을 비롯한 남인계 소장학자들과 어울렸다. 자연스럽게 이익의 유고遺稿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이익의 유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정약용의 당색은 어떻게 되나요?

본가도, 외가도, 처가도 모두 남인계였다. 근기남인(기호남인)으로 분류된다. 성호 이익 집안의 남인계 소장학자와 가까웠던 것도, 채제공이 정치적으로 각별히 보호해주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가 정치적 열세인 남인계 인사이면서도 조정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색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던 탕평군주 정조대왕의 배려에 힘입은 바 컸다.

정약용이 정조를 언제 만나나요?

정약용이 22세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1783). 여기서 정조대왕正祖大王을 처음 만났다. 성균관에서 생활하다가 28세에 대과大科(문과文科)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다.

규장각 초계문신이란 무엇이죠?

정약용은 관직에 나가자 곧바로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다. ‘초계문신’은 정조가 젊고 학식이 뛰어난 신료들을 선발해 독서와 학문을 심화시키도록 한 제도였다.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의미도 있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1781년(정조 5)부터 10차에 걸쳐 138인이 선발되었다.

정조는 왜 정약용에게 수원화성 설계를 맡겼나요?

정약용이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고, 이미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할 때 기술적 능력을 보여준 바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맡겼을 것이다. 또한 정조가 31세의 그에게 맡긴 것은 새로운 개념의 성곽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에 따라 정약용은 수원화성水原華城 축성을 위한 규제規制를 바쳤다.

정약용의 암행어사 활약상은?

33세에 경기 북부의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활약했다. 이때 백성의 궁핍한 실상과 관官의 혹독한 중간착취를 목격하고 시詩로 기록했다. 왕실의 권위에 의지해 탐학한 관리를 징계하도록 요구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형조참의를 맡긴 까닭은?

정약용이 황해도에 머물면서 그곳의 미결 사건 두 건을 잘 해결한 것을 보고, 나중에 정조가 정약용에게 형조참의를 맡겼다. 정약용은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몇몇 사건들을 조사하여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정약용은 어떻게 천주교를 알게 되나요?

그가 성균관 생활을 하던 23세 때(1784), 한강 두미협 부근을 배를 타고 지나던 중, 함께 가던 이벽으로부터 천주교天主敎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천주교 서적을 빌려서 보면서 천주교에 빠져들었다.

천주교가 문제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1785년 봄에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일명 명례방사건)이 있었다. 김범우 집에서의 의식을 하던 모임이 형조의 포졸들에게 발견된 것이다. 이때는 정치쟁점으로 비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해년(1791년) 발생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천주교 문제는 정치쟁점으로 비화되었다.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공서파와 신서파란 무엇인가요?

천주교에 감화된 사람들은 남인계 젊은이 가운데 많았다. 그런데 같은 남인계의 인사 가운데 같은 당색의 천주교도들을 맹렬히 공격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남인들 내부에 이른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의 대립이 생기게 된 것이다.

천주교가 문제된 이후 정약용의 처신은 어떻게 되었나요?

천주교에 감화되었던 정약용은 진산사건(1791)을 계기로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 천주교 쪽에서 제사를 금지하고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했기 때문에, 유학을 따르고 관리의 신분이었던 정약용은 태도를 바꾼 것이다. 36세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을 때(1797),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자신이 천주교도라는 비방에 대해 변론했다. 즉 젊었을 때 천주교에 빠졌지만,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지금은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정약용이 천주교의 비방에 시달릴 때 정조는 어떻게 대했나요?

정약용을 비방하는 자를 벌하거나 정약용을 잠시 지방으로 좌천시키기도 했다. 지방관으로 보내어, 그를 보호하는 한편 지방행정 경험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정약용이 천주교도로 몰려 화를 입은 사건이 무엇이죠?

신유년(1801) 정순왕후의 척사하교斥邪下敎로 촉발된 신유옥사辛酉獄事(1801)였다. 본래 ‘-사옥邪獄’이라 불렀는데, 천주교 쪽에서는 ‘-박해迫害’라고 부른다. 정약용은 선비들이 정치적으로 누명을 쓰고 희생당한 ‘사화士禍’로 여겼다. 이 옥사로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유옥사는 어떻게 일어난 것이죠?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자,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 조정은 노론벽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유옥사辛酉獄事를 일으켜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제거하고자 했던 세력은 다양했는데, 채제공 세력으로 분류된 이가환, 정약용 등이 주요 표적이었다.

정약용이 신유옥사로 어디로 유배를 갔나요?

첫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였고, 다시 옮긴 유배지가 전라도 강진이었다. 정약용은 1801년 2월 9일 새벽에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27일 밤에 출옥하여 장기로 유배되었다(사암연보).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유배생활을 시작했는데,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10월 20일 저녁에 다시 체포되어 27일에 투옥되었다. 11월 5일에 강진 유배 결정이 나서 늦게 출옥했다.

정약용의 둘째형 정약전은 어디로 유배를 갔나요?

신유옥사로 정약용과 같은 운명이었던 둘째형 정약전은 처음엔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를 갔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조사받은 후로는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강진으로 유배 가는 길은 언제 어디를 지났나요?

1801년 11월 5일 강진 유배가 결정되어 옥에서 나왔다. 그때는 북소리도 멎은 늦은 시간이었다. 밤에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에서 묵었는데 출옥한 바로 그날인지 며칠 후인지 분명치 않다. 금강을 건너 나주까지 형과 함께 내려왔다. 나주 율정에서 하루 묵은 후 새벽에 형제는 이별을 했는데, 그 날이 11월 22일이었다. 형은 흑산도로 가고, 아우는 월출산을 지나 강진에 도착했다.

정약용이 유배기간에 주로 했던 공부가 어떤 것이나요?

정약용은 유학 경전인 6경經4서書의 연구에 진력했다. 특히 예禮와 역易의 공부가 두드러졌다.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 연구는 1813~1814년에 집중되었다. 1815년까지 경학 연구를 일단락 짓고, 1816년부터는 「경세유표」(처음 이름 ‘방례초본’) 저작에 돌입했다.

정약용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 있나요?

정약용의 제자에는 읍중에 있을 때 수학한 제자[邑中弟子]들과 47세 때(1808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수학한 제자[茶山 18弟子]들이 있다. 읍중제자로는 손병조(준엽), 황상(산석), 황취(안석), 황지초(완담), 이청(학래), 김재정(상규) 등이 있고(괄호 안은 어렸을 때 이름), 다산 18제자는 이유회, 이강회; 정학가(학연), 정학포(학유); 윤종문, 윤종영; 정수칠; 이기록; 윤종기, 윤종벽(종정, 종억); 윤자동(일동), 윤아동; 윤종심(동, 종수), 윤종두; 이택규; 이덕운; 윤종삼(종익), 윤종진 이상 18명이다(괄호 안은 개명한 이름 또는 족보의 이름). 정약용의 두 아들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약용은 언제 얼마 만에 유배가 풀리나요?

1810년 그의 아들이 징을 울려 원통함을 호소하여, 벼슬 없이 고향에 돌아가게 하는 벌[放逐鄕里]로 낮추었으나(순조 10년 9월 21일), 반대가 있어 유배가 풀리지 못했다. 1814년 죄인 명부에서 삭제되어[停啓](순조 14년 4월 9일) 해배解配(유배에서 풀어줌) 관문關文(동급 또는 하급 관에 보내는 공문서)을 보내주려 했으나, 또 반대가 있어 유배가 풀리지 않았다. 1818년 부응교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문제점을 지적하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의금부를 책망했다(순조 18년 5월 25일). 마침내 8월에 해배 관문이 보내졌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와서 1818년 9월 초에 강진을 떠나 고향길에 오르니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이 마감된 것이다.

정약용이 유배가 풀려 언제 고향에 가나요?

정약용의 해배가 알려지자, 8월 그믐날 정약용과 그 제자들이 모여 다신계茶信契 절목節目을 정했다. 아마 이튿날인 음력 9월 1일 또는 늦어도 그 다음날엔 고향길에 올랐으리라 추정된다. 도착일자는 기록이 있다. 「자찬묘지명」엔 9월 15일(九月之望)로 기록하고 있다. 「사암연보」에는 고향집에 들어간 날짜를 9월 14일(十四日)로 기록하고 있다. 「자찬묘지명」은 정약용이 스스로 직접 쓴 것이기에 여기에 기재된 15일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그런데 보름은 대략적인 표현일 수 있고, 14일이 좀더 구체적인 것이어서 더 신빙성이 있을 수 있다.

정약용이 유배가 풀려 고향에 와서는 어떤 생활을 했나요?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75세에 고향 집에서 운명했다. 그동안 이미 지은 저서를 수정·보완하고, 덜 지은 저서를 마저 완성하는가 하면, 죽기 전까지 미흡한 부분을 다시 연구했다. 인근에 살던 당대의 석학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점검하고 보완했다. 한강 일대를 유람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왜 묘지명을 스스로 지었나요?

‘묘지명墓誌銘’이란 죽은 이의 삶을 칭송하여 적은 글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죽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지었다. 그래서 ‘자찬自撰’묘지명이다. 왜 스스로 지었을까? 60년의 인생을 돌아보며 새로 태어난 느낌으로 여생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의 삶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왈가왈부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천주교도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지금도 엇갈린 말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도로 몰려 죽은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의 묘지명을 써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정약용은 언제 세상을 떴나요?

1836년, 회혼일回婚日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의 학문체계는 어떤 것이었나요?

정약용은「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저술을 이렇게 소개했다.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을 수양하고 1표表·2서書로써 천하ㆍ국가를 다스리니, 본本과 말末을 갖춘 것이다” ‘육경·사서’는 유학의 기본 경전이다. ‘일표이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가리킨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바로 ‘수기’修己이고,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바로 ‘치인’治人이다. 그런데 유교 경전에 관한 공부를 ‘경학’,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공부를 ‘경세학’이라 한다. 그리고 ‘수기’를 위한 경학을 ‘본’으로 보고, ‘치인’을 위한 경세학을 ‘말’로 표현했다. 요컨대 다산의 학문 체계는 ‘경학=육경사서=수기=본’과 ‘경세학=일표이서=치인=말’의 둘로 구성된 것이다.

정약용의 ‘일표이서’는 어떤 책을 가리키나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세 저서를 ‘1표2서一表二書’라 부른다. 「경세유표」(1817)와 「목민심서」(1818)는 각각 48권으로 유배 기간 막바지에 저술했고, 57세 때 해배되어 고향집에 돌아와 「흠흠신서」(1819)는 30권을 저술했다. 「경세유표」는 국가 제도 개혁론이고,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의 행정 지침서이고, 「흠흠신서」는 형사 참고서이다.

정약용이 왜 「경세유표」를 지었나요?

제도가 오래되어 폐단이 발생하고 그냥 두어서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의식에서, 국가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경세經世’란 나라를 경영한다는 뜻이다. ‘표表’란 신하의 입장에서 왕에게 바치는 국가 경영의 계책인데, 죽은 뒤에라도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유표遺表’란 이름을 붙였다.

정약용의 「방례초본」은 어떤 책인가요?

「경세유표」의 처음 이름이 「방례초본邦禮艸本」이었다. 옛날 주周나라 주공周公의 「주례周禮」를 원형原型으로 삼아 우리나라의 왕정을 구현하고자 ‘방례邦禮’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개혁안이 앞으로 수정과 윤색을 거쳐 확정되기를 기다린다는 뜻에서 ‘초본’이라고 했다.

정약용이 왜 「목민심서」를 지었나요?

제도 개혁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현행법에서라도 우리 백성을 살려내려는 뜻’[因今之法而牧吾民也]으로 '목민심서'를 편찬했다. 현행 법제로라도 백성들을 직접 접하는 수령들이 각성하여 훌륭한 정사를 편다면,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목민심서」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제1편 부임赴任, 제12편 해관解官이다. 그 사이에 목민관의 덕목인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을 제2~4편으로, 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의 육전에다 진황賑荒을 더해 제5~11편으로 편성했다. 각 편은 각각 6개 조로 구성되었다. 정약용의 관직 경험,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사서史書·경전經典·법전法典 등에 담긴 목민에 관한 자료, 선행先行 목민서 등이 망라된 지방 정치와 행정의 종합적 기본서다.

정약용이 왜 「흠흠신서」를 지었나요?

인명人命을 다루는 옥사라 잘해야 하는데, 옥사를 잘하는 관리가 적음을 걱정했다. 형사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억울한 옥살이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이 없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명을 존중하여 중대한 범죄를 처단[斷獄]할 때는 삼가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나요?

통치권력의 근원이 백성에 있다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다. 그는 「원목原牧」에서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본디 마을 사람이 아래로부터 추대하여 지도자를 추대하여 넓은 단위 공동체의 군주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탕론湯論」에서는, 백성을 괴롭히거나 목민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군주는 추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삼농’이란 무엇인가요?

농업국가인데도 사·농·공·상의 네 가지 직업 가운데 농업의 처지는 열악했다. 높기로는 선비만 못하고, 이익으로는 상업만 못하고, 편안하기로는 공업만 못하다. 이 세 가지를 개선하지 않으면 농사짓기를 권할 수 없다는 게 정약용의 생각이었다. 그는 대안으로 3농 정책(편농, 후농, 상농)을 피력했다(1796). “첫째는 편농便農이니 편하게 농사짓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후농厚農이니 농업이 이익이 나게 하려는 것이며, 셋째는 상농上農이니 농민의 지위를 높이려는 것입니다.”(「응지론농정소」) 그리고 첫째 ‘편농’을 위해서는 농기구를 개량하고, 농업 기술을 개선하고, 수리 사업을 일으켜야 한다. 둘째 ‘후농’을 위해서는 환상법還上法의 폐해를 제거하고, 부업과 작물 다각화를 장려하고, 도량형을 통일해야 한다. 셋째 ‘상농’을 위해서는 과거제도를 개선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농사를 짓도록 해서 놀고먹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하며, 양역법良役法을 개선해야 한다 등의 방책을 제시했다.

정약용이 주장한 ‘여전제’는 어떤 내용인가요?

37세(1798년)에 지은 「전론田論」에서 제안한 토지 제도였다. 이른바 ‘여전제閭田制’는 25~30가구를 여閭로 하여 여민閭民의 공동 노동을 통해 생산과 수확을 함께하며, 여민이 선출한 여장閭長의 지도에 따라 소득과 분배가 공평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한 대단히 이상적인 전제田制였다. 토지의 불균등한 점유로 빈부의 격차가 심한 불공정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주장으로, “경작하는 사람에게 농토가 있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

정약용은 기술에 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었나요?

정약용은 「기예론技藝論」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라 지려智慮와 교사巧思를 활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기술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기예가 더욱 공교해지고, 세대가 내려올수록 기예가 더욱 공교해진다고 했다. 적극적인 기술의 도입과 개발을 주장하여,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전담 기구를 신설하자는 주장도 했다. ‘이용감’이란 용어는 ‘이용후생利用厚生’에서 빌린 것이다.

정약용은 일본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정약용은 일본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시노모토 다다시篠本廉와 같은 일본 고학파古學派 등의 유학 연구 서적을 읽었다.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경향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점차 높이 평가했다. 일본이 학문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강소江蘇·절강浙江 지방과 직접 교역하면서 좋은 책을 구입하고 있고, 과거科擧 제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약용은 서학 내지 서양 과학기술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정약용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읽었다. 처음 감화를 받은 종교적 내용은 나중에 문제가 되어 관계를 끊었지만, 그의 유학儒學 연구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약용은 서양의 과학 지식을 알게 되었다. 얻은 지식을 수원화성 축조에 유용한 기구를 만드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여유당전서」는 언제 발간되었나요?

정약용의 저서는 필사본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말함)가 개별 출간되기도 했으나, 전체가 완간된 것은 1938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처음이었다. 30년대 조선학 운동이 전개되던 무렵, 마침 1936년이 정약용 서거 100주년이 되어, 그 기념사업으로 「여유당전서」 76책을 편찬·발간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출간 이후 발견된 저술들을 모아 영인影印한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 5책이 간행되었다. 이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정본화定本化 사업을 한 결과 2012년에 「정본定本 여유당전서」가 출간되었다.

[출처] 김태희, 「정약용의 삶과 글」, 2019, 실학박물관, 155~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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